# 어지러운 사람들의 말, 그리고 말





아침이 되고 밤이 되니 그 다음날이 되었다. 

밤의 시간은 잠든 시간이자 죽은 시간이지만, 

내일을 꿈꿀 수 밖에 없는 간절한 시간이기도 하다. 


심한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부터 길이라기 보다 하천에 가까운 도로변을 따라 걸었다. 

엉성한 걸음걸이로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을 헤집고 큰 길까지 나섰다. 

숙소 문 밖으로 종종 택시가 지나치기는 했으나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형광색 택시를 잡아 타고 원하는 목적지를 말했으나, 도통 알아듣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지도를 꺼내 보이고, 한국 직원이 메모해 준 태국어까지 동원하여 결국에. 

택시기사는 후진기어를 넣고 반대편 차선으로 방향을 바꿀 준비를 했다. 


그제서야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안심, 하는 듯 했다. 





이튿 날 한국대사관 내 직원은 비교적 친절했다. 

일도 수월하게 처리하는 듯 예상 시간을 앞당겨 대사관을 나올 수 있었다. 

빗방울은 나무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청색 기와의 가장자리를 타고 떨어지고

미지근한 빗물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흰 셔츠 앞 단추를 적셨다. 

물기와 습기를 구분하지 못할 날씨였지만 비는 습기보다 차갑고 가벼웠다. 

여기서 바라보는 만큼은 한국의 빗방울이었다. 녹색의 흰색의 청색의 빗방울. 

회색 콘크리드 벽은 빈 몸을 그대로 내놓았지만 젖은 듯 젖지 않은 듯 했다. 


택시는 또 한번 우리를 사톤에 위치한 이민국으로 안내했다. 

물어 물어 서류심사를 담당하는 부서에 도착해 차례를 받고 기다렸다. 

여행객이 서류를 복사하고 출력하는 일 등을 해야한단다. 친절한 한국대사관에서 미리 귀뜸만 해주었어도, 

수월하게 마치고 일정을 소화했을 텐데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서류를 심사하고 여행증명서를 발급받기까지 약 40여분 동안, 

나는 줄곧 현지인과 서구 여행객들 사이에서 두리번 두리번 댔다. 

그들의 말 가운데 앉아 간혹 불거져 나오는 단어와 억양을 들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주시당하지 않은 존재였고, 그들 또한 나에게 여러사람이었다. 

모국어로 누군가 나를 불러주기까지 나는 하나의 그림 속에 그려진 사물이었다가, 

곧 그녀의 말 속에 편입되어갔다. 또 한번 눈을 마주치자 내가 보였다. 그대 눈 속에 담긴 내가 보였다. 

그 많은 말들 속에 우리는 또 서로의 말로 작은 공간을 만들어 차지하고 그들은 또 그들의 공간에, 

그렇게 공간을 차지하고 서있는 이 모두의 그림들이 잠시 어지러웠다. 이민국은 축구장과 같이 커다란 공간이었기에. 


어쩌면 나는 모국어로 말하는 그녀의 반가움에 현기증을 일으켰는지도. 




# 멸치는 국물만 내고 끝인가


 



오후가 되자 땅 위로 출렁였던 물이 증발해 공기중으로 스며들어갔다. 

사람들의 냄새가 입안에 씹혔다. 웅덩이 안으로 하늘의 나이가 보인다. 


카오산 로드, 젊은이와 세계 여행객들의 거리. 

그 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배낭객들의 다부진 소리들이 여기저기 들리고, 

이쪽 저쪽을 오가며 호객하는 현지인들의 장난섞인 말투와 표정에도 여기는 확실히 이국 땅이다. 

땀 섞인 공기라도 질색하기는 커녕 짙은 매연의 연기보다 낫다 싶어 반가움에 걸었다. 

간이 휴게실에 트렁크를 맡기고는 홀가분한 몸이 되어 걸어갔다. 


멸치는 국물만 내고 끝인가, 

문득 이 모든 여정들이 이 순간만 스치면 사라지고 말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시원한 육수를 내고 버려지는 멸치의 몸, 뜨끈한 육수로 뒤범벅 된 나의 몸 또한, 

이 과정이 지나고 찬 물로 샤워를 하면 익숙하게 잊어버릴까. 

사실의 기록보다는 감정의 기록이 내게는 더 소중한 나머지, 

멸치는 국물만 내고, 시원한 육수 한 모금 하면, 잊어버리기 쉬운, 

나는 땀을 흘리고, 시원한 냉수 한모금 하면, 금방 잊어버릴 것 같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쓰고 또 쓴다. 




# 사랑해 본 적 있는가





'사랑해 본 적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최근 읽은 시의 한 구절이다. 


어디로 가는 중이오? 라고 묻는다면,

집으로 갑니다. 결국에 집으로 갈 것이겠지요. 

사랑해 본 적 있소? 라고 또 묻는다면, 

하는 데 까지 해보려고 합니다. 

그런 적, 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지금 살고 있어요. 


과거에도 현재에도 사랑 (받는) 중입니다. 

내가 그런 것도 못해봤을까봐, 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사랑이겠지요. 

지도에 없는 마을과 그 길에도 분명 사람은 다닐 것이니까요.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지요. 

사랑도 돌과 같아서 순간순간 굴러야 녹슬지 않습니다. 

다툼과 화해, 오해와 진심, 질투와 평화,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셈이라면 

아주 행복한 겁니다. 사랑을 갈라놓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무관심이라는 것이니까요. 

나는 누군가와 매일 눈을 마주쳐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사랑하고 있는 것이 맞아요. 

그리고 가능한 그런 사람과 사랑해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옷벗고 바람이 되는 빈 몸






습기, 젖어있는 무게


오후에 다시한번 심한 비가 내렸다. 

땀을 흘리는 일은 종종 있어도, 

땀에 젖는 일은 드문 일이다. 


피부는 숨을 쉬기를 원했으나, 

나는 피부가 타는 것을 더는 원치 않았다. 

나는 잠시 후 그 이상을 더 원하게 되었다. 


옷을 벗고

바람이 되는 빈 몸을, 










# 고잉 홈





비행기 시간까지 6시간이 남았다. 

해가 지는 순간에 번쩍 하고 느낌이 남았다. 

무슨 생각인지 웃고 싶었다. 웃게 하고 싶었다. 

먼저는 노란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에는. 






평소에도 머리를 자주 바꾼다.

옷 사입는 것 보다야 머리를 바꾸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에서. 

평평한 이마를 잘 드러내지 않지만, 딱 8시간만 해보자. 라는 생각에서, 

근데 좀 비싼 면이 없지 않다. 깍아서 2만 5천원 정도로 합의하고, 

껄렁껄렁한 표정을 지으면서, 보여주면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공항으로 가는 열차 안, 

탑승을 기다리는 공항 안, 

대기하는 로비의 인터넷을 잠시 만지작 거리다, 

문득 고잉 홈, 

나는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안다. 

결국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안다. 

이런 목소리를 접하고, 괜히 편해졌다. 


좌석이 불편해 잠을 못이뤄도, 

더더군다나 오후에 한 머리 때문에라도, 

나는 계속 눈만 감고 있었던 터라

시간은 좀처럼 간다고 여겨지지 않았지만. 

집으로 가고 있다. 

돌아가는 길이란 표현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집으로 가는 길에, 

시계 우는 소리가 들렸고, 

창 밖의 나이는 깜깜했다. 

아침에 이르러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리고, 

창 밖의 나이는 환해졌다. 

곧 기억의 발소리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가장 어려웠던 세상이 바로 너다. 

사랑하는 사이는 편한 사이가 아니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어려워 하는 사이가 되야 맞더라. 

멀리서 보되, 가까이서 소리를 듣는 그런 사이가 되면 

참 좋겠다 했다. 

어려워해야 더 편안한 사이가 될 것 같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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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는 흥정에 약했다.

거절할 줄도 몰랐고, 성큼 내민 제안에 묵묵부답함으로

그 뜻을 따를 것처럼 행동했다.

내 뜻은 내 안에만 있다. 그래서 됐거니, 했다.

 

그처럼 사니, 부당함을 느끼고 사는 시간은 없었다.

내 뜻을 내비치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사건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순리'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비겁'이었지만.

 

다툼이 싫다. 말다툼, 마음을 향하는 섭섭함 등의.

그렇다고 상대방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영원히 만나지 못할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는 셈이다.

 

이 세상에 행복한 길은 없다.

행복으로 향하거나 불행으로 치닫거나,

목적이 분명한 길들은 많지만.

 

 

 

# 명시되지 않은,

 

 

 

어려움 없이 반 페 선착장에서 방콕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오른편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현재 위치와 앞으로의 행로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지도 대신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걸어걸어 이쪽 저쪽을 다녔던 게 생각이 난다.

이동하는 중에는 내가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에 도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사실, 그것만 그려져 있다. 지도에도 현재 내 머릿속에도 마찬가지,

 

돈을 주고 사야하는 세 가지가 제공되었다.

방콕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제공된 세가지 덕분에,

지도나 여행안내책자에는 없었던 내용들을 발견하게 된 것에,

명시되지 않은 그 무엇무엇들이 여행길 중간중간에 많을수록,

예감은 하나로 '좋다'.

 

 

 

# 하늘을 보는 것처럼 너를 본다면 좋겠다.

 

 

 

 

방콕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다가도 그렇지 않고, 때로 폭우가 내리다가도 금방 그쳤다.

잃어버린 여권의 행방은 묘연한 게 당연하고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으려 태국 내 한국대사관으로 갔다.

친절한 현지인 안내원과는 달리 한국대사관 내 한국인 직원들은 꽤나 불친절했다. 당연하게 여겼다.

여권이나 짐을 잃어버린 여행객들을 상대로 한 민원이 얼마나 많겠냐만은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은 단 한번이므로,

낯선 곳에서 당황하고 놀란 마음을 향한 모국이 한국인 사람들의 말투와 행동에 적잖히 화가났다.

증명서 발급서류를 제출하고 내일 오전 중에 다시 방문하라는 말에 더운 바깥으로 쫒겨나다시피 나왔다.

 

방콕의 하늘은 또 한번 비가 올 것 같다가 그렇지 않았고, 뜨거운 태양이 콧등을 쓸어내렸다.

가까운 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짐을 풀었다. 오후부터 자정까지 구경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일단은 강으로 간다. 지하철은 시원했고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태국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하고 그 외의 짧은 거리는 썽태우를 탈 것을 권한다.

비용과 시간이 택시를 타는 것보다 훨씬 저렴할 때가 많으니까.

 

하늘의 넓이를 본다.

하늘의 넓이를 보는 것처럼 하늘을 본다.

높은 하늘이지만 늘 적당한 거리에서 전체를 볼 수 있다.

타는 태양도 겹친 구름도 젖어내리는 비도 순간순간 볼 수 있다.

그렇게 너를 본다면 좋겠다. 어느 한 구석 한 모습으로 전체를 가리는 일 없이,

적당한 거리에서 너의 완연한 모습을 하늘을 보는 것처럼 한다면 참 좋겠다.

모든 인연에서 떨어져 나올수록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의 온기, 

그리고 나를 위안하는 하늘의 끝없는 넓이. 

 

 

 

 한화로 약 3만원 정도하는 모텔. Huai Khang 역 부근

 

 


# 단출한 행장

 

처음으로 짐 가방이 아닌 카메라 가방만을 가지고 거리로 나섰다.

외딴 시골의 마을에서는 반쯤 벗어놓은 상태로 활보했지만 도시에서 그러기란 쉽지 않은 일.

반바지에 슬리퍼를 걸쳐놓으니 현지인이 따로 없다. "싸와띠캅~" 인사를 받았다. 그것도 외국관광객으로 부터.


 



짜오프라야 강, 후아람풍 기차역에 내려 15분여를 걸어가니 호텔과 인접한 선착장이 나온다.

한강 유람선도 못타본 내가, 사흘 내내 배만 탔던 내가, 탈 성 싶으냐.

사진찍고 이모저모 구경할 새도 없이 약 20여분만에 그곳을 탈출했다.

무얼 먹을까, 어디로 가볼까, 해는 뉘엿 지는데 왕궁을 가야할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배고프니 밥을 먹자, 어디에서 먹을까, 여기 지나면 더 맛있고 근사한 데가 나올꺼야,

그렇게 걷다보니 고양이 친구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전자상가의 뒷골목이 나왔다.

일단은 밝은 데로, 일단은 사람 많은 곳으로, 썽태우를 탔다.

단출한 행장이어서 도리어 걷고 또 걷고,

확실한 힘듦이 없어서인지 포기를 모르고 고양이가 나오는 뒷골목만,

그렇게 서성였다.





2500원 짜리 오토바이를 타고 밥먹는 데로 가자고 했더니, 차이나 타운을 지나쳐 꽃시장으로 데려다 주었다. 

찌륵한 흙이 바닥으로부터 튀어올라 종아리며 허벅지며 엉겨붙었다. 로타리 한가운데서 쉬어갔다. 

가벼운 입씨름 후, 다시 2500원어치 오타바이를 타고 차이나타운으로 갔다. 

무얼 먹어야할지 도무지 생각이 안난다. 때는 덥고, 다리는 아프고, 동행으로부터 멀찌기 앞장 서 걸었고.

태국에서 중국음식을 먹었다. 

볶음밥. 을,




# 그 날의 일기





모종의 계획을 하고 갔건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었고.

피곤한 발 씻는 중에 갑자기 미련한 미련이 남아 스스로 어두워졌다. 

폰을 꺼내 조금씩 써내려갔다. 


"그 사람의 평상시다.

특별한 날 특별한 체험을 하고

특별한 모습을 본다한들,

그것이 내 선택의 전부가 될 리 없다.


그 사람의 평상시다.

그것은 늘 변하는 그의 모습이다.

자신의 맡은 바 일을 하고 삶을 사는 것이

내 발 씻겨주는 듯한, 시원하고 고마운 자극이 되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라 하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이 어떤 존귀한 선물보다 더,

고마운 그대의 모습이 되겠다.


나는 그것이 내게 사랑이라 생각된다,

너는 내게 매일처럼 프로포즈를 하는구나. "


함께 발맛사지를 받고, 멋쟁이 할아버지 옆에 앉아 피곤한 밤을, 달려 그제서야 만났다. 

마지막 밤, 그 마지막 밤에 너는 핸드폰을 잃어버려 마지막 밤은 더 애틋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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