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서 마루 밑으로 포도 한 알이 떼굴떼굴, 

그 소리 어찌나 명랑한지 외양간 앞 백구가 힐끔 쳐다보았다. 

태양이 파고드는 곳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침묵은 아니었지, 그건 모두가 땀을 흘리며 웃는 소리였지


덜 말린 지푸라기 태우는 늦은 저녁에,

하늘의 달과 별의 은근한 조명을 두고

스테레오로 연주하는 매미들의 합동 공연이 열렸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도레미파솔라시도처럼


활기찬 피의 향연에 한창인 모기떼들에 대항하는

여러개의 손이 춤을 추는 동안에도 

한 아이는 잠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았다. 


싫을 이유가 없는 밤이 있었다. 

그것은 일년의 밤 중 가장 긴 것이었다. 


모두가 익어가는 중이었다, 밤에도 낮에도 잠잠히.

즐거워 즐거워 모두가 껍질만 남은 수박처럼, 

씨익 웃고 있었다.


여름은 열린 마루를 채우는 가치로운 빛이다. 

한동안은 그 빛에서 살았다. 

검게 그을린 빛의 흔적을 자랑스러워했건만, 

 

언제부턴가 여름의 알몸을 수치스러워 하게 되면서


젖은 땀을 식히는 맛있는 낮잠이 사라졌고, 

풀벌레 우는 귓가에 스친 생각의 놀이가 사라졌고, 

친구들과 멱을 감고 남은 까만피부의 유난히 새하얀 치아도.


이제, 


어디로 가버렸나 그 때의 달달한 솜사탕은 

높이높이 구름에 딸려 저만치 흘러가고 있는 건가. 

가면 어딜 가는 건가, 


내가 바란 여름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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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늦은 시각에 냉장고를 열었다. 

다섯개 들이 요구르트 중 하나를 따서 목을 축이다, 문득

내 집 냉장고에 늘 같은 향기의 반찬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낸다. 


늦어도 두 달에 한번 씩, 저 밑의 나의 부모가 사는 땅에서 보내준 음식들. 

사실, 나는 그것을 보기만 해도 늘 배가 불렀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보기만 했지, 꺼내 실컷 먹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값이 비싼 굴비며, 정성껏 볶은 멸치며 김 부각이며 하는 것들을.

나는 좀처럼 힘을 내 먹지 못하고 늘, 새로 온 반찬에 밀려 냉동고나 혹은, 

음식물 쓰레기에 눈물을 머금고 쳐박아 두었다. 그랬다, 


반찬은 내 뱃속에 있던 것이 아니라, 늘 눈에 찼고 마음에 찼다. 

그림의 떡이란 옛 말이 이것과 맞는 말은 분명 아니었겠지만, 나로서는 그랬다. 

그 자리에 그 통에 늘 담겨있는 것이라고 물을 마실 때마다 냉장고를 열어 확인했다. 


까만 밤, 불 꺼진 거실에 냉장고를 열 때의 그 옅은 주황의 불빛 속에서 타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의 사랑은 늘 그렇게 타올랐다. 나는, 그것이 내가 늘 그려온 그림처럼 눈에 닿아, 

만족하고 만족하면서 먹을 줄 몰랐다. 그것이 그렇게 보란 듯이, 보란 듯 만들어온 집의 반찬. 


어두 컴컴한 밤 하늘에 그 하나 밝게 떠서, 

약하나 은은한 빛을 내는 달에, 

타오르는 서늘한 정원의 냄새. 그것이, 난다. 


그러면서도 먹을 줄 몰라, 매번 삭힌 보리차를 코로 숨을 쉬지 않은 채로. 

맛을 음미하지 않고 벌컥 마셔댄다. 숨이 차오르는 그 때가 오면 뒤돌아보지 않고, 

냉장고문을 훅, 닫아. 식기 전에 다시 타오르게 한다. 


달빛 정원의 

그 묘한 풍경을 나는 냉장고를 통해 본다. 

눈으로 보고 코로 맡으며 정작 입에 닿지는 않는다. 


병이다, 

나는 이 풍경이 언젠가 끝날 것을 알지만, 두렵다. 

또한 그 날이 속히 올 것이라는 것도 알아서, 두렵다.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그리고 잃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 깟, 반찬의 풍경 앞에서 늘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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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서 혹은, 

우리가 만나서. 


사랑하지 않아서 혹은, 

미워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아니었다가,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가. 


알게 되면서 그래서(그로부터),

멀어지게 되어서.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듯 마는 듯, 

우는 듯 웃는 듯. 


하늘엔 총총 별이 많고 

우리네 세상엔 말도 참 많아


나를 만나서 혹은, 

우리가 만나서.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언제나, 

나와 가장 가까운 것들이니.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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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광택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빛나는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일생에 한번

 무지개같이 변하는 사람을 만난단다.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더 이상 비교할 수 있는 게 없단다."



명대사가 있다는 것은 대화가 많다는 증거, 

그러나 영화에서 대화보다는 줄곧 두 남녀 주인공의 편지같은 독백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독백은 대화의 단절에서 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후에 줄리가 브라이스에게 '실로 나는 너와 대화를 한 적이 없구나' 하는 말에 담긴

영화의 메시지는 명대사만큼이나 좋은 이유가 되었다, 


모든 사건들에 대한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없어도 충분히,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고, 그럴듯하게 인물과 감정의 선을 묘사하는 부분들 때문에, 

뻔한 결말인데도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비스듬히 그러나 뒤척이지 않고 영화를 봤다. 


무지개같이 변하는 사람을 만나면, 꼭 곁에 두어야 할 것이다. 

허나, 그것이 내게 올 때에는 몇 번의 오해를 견디고, 실망을 안겨주고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의 밑거름이 있어야 하겠다. 물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내 곁에서 벌어져야 하고. 

대신, 나는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 곁에서 내 마음을 아주 잘 관찰해야 한다, 


내 마음의 부분부분이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하고. 

네 마음의 전체가 아름답게 보이더라도, 어느 한구석 감추고 싶은 감정 하나 없다고는 못하지.


결국에, 대화는 서로의 부분을 꺼내어 공유하고 

전체가 아름답지 못함을 인정하면서도 감싸주고 사랑하고 사랑받게 해 주는 것. 이라고, 

그렇게 영화는 내게 써줬다. 


오늘, 또한 감사하게도.  





플립

Flipped 
9.5
감독
롭 라이너
출연
매들린 캐롤, 캘런 매컬리피, 레베카 드모네이, 안토니 에드워즈, 존 마호니
정보
코미디, 로맨스/멜로 | 미국 | 93 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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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하나가
기억에 목 마를 때까지 
슬피 운다. 

두고 온 언제 그 밤에 
붙여논 껌딱지 
딱딱하게 굳고 말라 
내 입안에 있던 것. 

즐겁기로 한 두해 
지겹기로 연 이틀 
포괄하는 시간이 
때론 쏜살같이, 때론 더디게 

사이로 난 길은 매력이 있다. 
큰길로 가라하는 아버지 말씀 
나이테가 몸안에 새겨지면
그로부터 침묵이 이어져온다. 

기억에 기억을 본 떠 
기억을 만들고 
사랑을 본 떠 사랑을 만들 수 
있겠냐마는 

내가 본 세상은 
붙여논 껌딱지보다 못하다.
내 입안에 있던 것 
유들유들 혀로 모양을 만들고

두고온 밤 잊혀진 하나가
슬피 울어 잠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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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

인사를 나누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헤엄치듯 구름위를 지나간다. 

달이 빠른 것인지 구름이 빠른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을 궁금해하고 

과연 

바람의 온도가 참 좋구나. 이밤,

밤이 지나기 전에 남겨야 할 것은
기억, 이것. 

그러다 슬픔이 엎질러졌다.
그리운 이는 항상 있기 마련, 

지치지만 만족스러운 그리움
순수한 것이 가장 오래 남겠지. 
아마도

망각이라는 선물
기억이라는 슬픔이라 했다. 

남겨진 것들에서 나는
슬픔의 향기로 인해

잠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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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집을짓고

어머니는밥을짓고

할아버지는농사를짓고

동생은모래성을짓는다.

친구는추억을짓고

그대는사랑을짓는다.

이모든것들이내게로와

나는노래를짓고,행복을얘기한다.

주머니돈한푼없이도

미소짓게되는그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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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그런 날이 찾아왔어
일년보다 긴 하루

오늘 하늘을 보다가
아니 하늘이 날 본 것이겠지

눈이 마주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네 눈을 피하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오늘 하늘을 보다가
아니 하늘이 날 본 것이겠지

모든 건 갑자기 일어나지 않아
꿈틀대다가 벌떡 일어나지도 않고

천천히 떠 가는 구름이
저만치 멀어졌을 때 바라본거야

하루동안 얼마나 왔을까
그런 건 일년에 한번씩 계산하는 거야

그런데
불쑥 그런 날이 찾아왔어
일년보다 긴 하루

하늘이 날 보는 순간에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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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에 찬 달이 밝은 그 밤에
우린 더 어둔 밤을 찾으려 눈을 감았지

계속해 이어진 밤이 둘로 나뉘고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선 집으로 가는 길

뻔한 가로등불에 골목길은 물들어
색을 잃고 노랗게 붉게 어둠을 가리지

나는 아까처럼 더 어두워지길 바라지
입술에 찬 달빛이 간절히 생각날 때까지

일부러 깜깜해진 골목을 헤엄치듯
유영하듯 걷고 기분이 참 맑아
일부러 깜깜하게 해놓고
일부러 깜깜하게 해놓고

네 입술에 차오르던 달빛이
간절히 생각나기까지
두 개 발자국으로 걸어갔지
손은 잡지 않고 어깨와 어깨가
닿을 듯한 거리로 나란히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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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엔 바보가 산다

'바보' 일반적이지 않은
낙성대 역 입구 계단을 내려가면서
아저씨 혹은 아가씨 불러세워
낙성대 역이 어디에요 묻는다

'바보' 일반적이지 않은
마을버스 14번 기사아저씨와
손악수를 나누고, 화이팅
매번 기사아저씨는 낙성대 역을
손짓으로 가르킨다 웃음으로

'바보' 일반적이지 않은
야 임마 몇번을 말해
동네 아저씨는 정류장에서
그 놈을 붙잡고 훈계를 한다

'바보' 일반적이지 않은
일상인 일이지만

그 놈은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
낙성대 역이 어디에요
오늘 아침에도 그 놈은 얼룩무늬
스커트 입은 아가씨를 불러세워
물었다

어리둥절 하면서도 친절하고
화를 내면서도 친절하다
그러니까 그 놈은 매일 그렇다

예전 내가 살던 마을에도
'바보'라 불리는 청년이 살았다
한 마을에 하나씩 그런 놈이 있다
사람들의 무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동네엔 바보가 산다

'바보' 일반적이지 않은
'바보' 멍청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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