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요를 따라 가면 물이 있고

흥국사 가는 길 

난데없이 회상에 젖는다. 
흥국사로 올라가는 길에 한 생각이 아니다.
그저 지금의 일부일 뿐,
누군가 아프다. 누구나 아프다.
없어져야 할 인간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다.
그러나 세상의 플러스와 마이너스 법칙은 온유하다.

누구의 누구. 
나는 누구의 누구기 때문이라는 사실만으로
세상에 존재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나의 누구.
나의 누구로 인해 세상은 편성되며
나의 누구는 내가 살아가는 전부다.

나의 누군가의 부재는 상상만으로 가능했지만.
이제는 실제로 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나의 부모도 늙고, 병들어 가니까
모든 사고의 위험에 노출된.
우리. 니까.  







류장. 수많은 나를 관찰할 수 있는 장소. 

 





 



소리의 근원. 
나는 줄곧 소리를 내는 방법을 연구해왔고. 
결국 움직이지 않고 나는 소리는 없음을 알았다. 
소란한 마음의 소리는 내가 움직이지 않을 때 나고,
정돈된 마음의 소리는 내가 어느 방향으로 온전히 움질일 때 난다. 

여행의 온건한 표현이란 소리의 잠적이고. 
그것은 새로운 소리에 가까이 간다는 의미이며. 
과거 나를 괴롭히던 수많은 소리에 대한 객관적 회고다. 

모든 자연의 힘을 빌어 나는 쉬고 있다고 하는 변명 대신에. 
그 누구보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시공간. 
멀리 떠나는 것도 좋지만, 가볍게 떠나는 것이 더 좋은. 
trip


여자와 남자를 가르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집. 





내 입은 자주 play 되지 않는다. 내 귀 또한 마찬가지. 
엄밀히 말해 나는 노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좋아한다. 
노래 자체보다는 노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bus stop'과 같는 거울에 비친 글귀를 우연히 발견하는 것.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 무릎이 새빨간 피로 번지는 걸 보면서
아프다가도, 애써 돌뿌리를 캐내 복수할 것처럼 물속으로 쳐박는 것. 
그런 적 없는 행동을 그런 적 있는 행동으로 간직하기 위해서 
뭐라도 해보는 것. 그 모든 가능성을 노래로 만드는 것. 

그 노래가 되기까지의 기록들을 나는 좋아한다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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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두려운 이유는 보이지 않는 깊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깊이로 인해 물의 속을 볼 수 없는 것이겠지.
사람의 속도 마찬가지,
너무 깊은 사랑과 사람은 옆에서 보는 누군가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물처럼 맑고 물처럼 흐르며 물처럼 누군가를 자기 안에 살게 하는 마음은,
거센 풍랑에 더러워지고 상처받았어도 시간의 자정작용으로 치유되는 마음은,
사람의 것과 닮았다. 






물의 마음.   

깨끗하여 저 속이 훤히 드러나는 것도 모른 채

스스로를 수만번 흐르게 해.

깊이를 잴 수 없는 곳에 잠기게도 하고

날 수 없는 우리 몸을 떠 있게 해주네. 

어딘가로 가는 길의 마지막은 꼭 나이길. 

모든 것을 받아, 

줄 수 있는것만 같은 바다.

그토록 마르지 않는 샘. 








그제서야 잠에서 깬 내가 보인다. 유아기적 낮잠에서 깨어나니 보이는 건 바다. 
한국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광활한 바다를 보기는 어렵지만, 나는 넓은 바다보다는 연안이 좋다.
연안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멜랑멜랑함이 좋은 걸까.
연안은 떠남의 장소이고자 만남의 장소이고자. 하는 느낌에서다. 
해변은 여름바다, 해안은 교과서에 나올법한. 쓰기 나름이지만 연안이라는 말이 나는 참 좋다.  

 자주 거닐었다. 지금 이 곳을 자주 왔었다. 집과는 꽤 멀지만 충무동에서 교동 방향으로 쭈욱 걸어가면 시끌벅적한 시장을 지나 이곳이 나온다. 하루 반나절을 이 곳 오동도에 와서 해가 저물녘까지 놀았다. '놀다'의 주체만 있을 뿐 놀이의 대상이나 놀이의 도구는 없었다. 지금의 아이들처럼 컴퓨터 게임이 일상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았고 만질 수 있는 것에 늘 지루함과 따분함만 느끼는 나였으니까. 물론 가난은 금상첨화였고.  나의 외할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 배를 타고 여수나루터에서 뗄감을 팔았단다. 여행이 끝날무렵 외가를 찾아 할아버지와 저녁을 하면서 그때 배로 얼마나 걸렸는지 물어보았다. 40분 정도. 고흥 도화에서 배를 타고 이곳 여수에 와서 새벽부터 오전까지 해온 장작더미를 팔았단다. 그 돈으로 내 엄마의 형제들과 밥을 먹고 논과 밭을 사고 후에는 나를 키웠단다. 이제는 노쇠해서 흐릿한 두 눈동자에 어느 덧 기운이 불어들어갔다. 회상은 노인에게 참으로 큰 위안이자 힘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바다를 늘 안겨주었다. 그것은 사실대로, 바다의 한가운데로 나를 집어넣었다. 살아서 나오는 것은 너의 의지에 달렸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가르침에 난생 처음으로 욕을 해댔고, 그러면서 헤엄을 쳤다. 가까이에서 본 바다는 무서웠다. 뭍에서 본 것처럼 아름답지도 깨끗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 맛이 짠 것을 넘어 쓰기까지 했다. 발 밑은 모래는 커녕 갯벌이 나를 삼키려 달려들었고 온전히 수면 위에 떠 있는 것만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얼마 후에 알게 되었다. 누구나 그런 형벌을 달게 받는 것은 아니다. 나는 거절하는 법을 몰랐고 시키면 시키는 데로 모든 것을 흡수해나갔다. 지금의 나는 그 때의 물과 흙이 빚어낸 것이라고 늘 말한다. 

 



바다는 온기다. 
 
늘 따스한 기억으로 맞아주니 말이다. 
 
내가 여수를 떠난 1992년 이후로 
 
나는 늘 물이 없는 곳으로 곳으로 갔지만. 
 
기억함에 있어 바다는 신화처럼 
 
나는 그 곳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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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이름처럼 아름답고도
간결한 제목이 없다.

그리고 나는 어찌할 수 없이
그 제목에 매료되어갔다.

팸투어라고 부르는 그것이라도 나는, 

모두로부터 혼자이기 때문에
더 가중한 외로움을 지고 갔다. 

실은 더 즐거운 일 아닌가. 
고마워도 보고, 미안해도 보고. 
혼자여도 보고, 함께여도 보고. 





 아름다운 기억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줄곧 이브의 '사과'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늘 내 유년기에 대해 시골에서의 순진무구한 삶이라고 얘기해왔지만 그 투명한 유리가 깨어질 무렵이 여기 여수에서부터니까. 한번도 하지 않은 얘기다. 나는 여수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자 했기 때문에, 실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다.  그런데 그 바라지도 않은 것들이 되살아나고 말았다. 한걸음 뗄 때마다 그 때의 퍼즐들이 하나씩 끼워맞추기를 시작했다. 잃어버리지도 지워지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나에게 이 곳은 각인된 감정들로 채워진 무덤이었다. 새롭게 알게 된 감정들로 인해 나는 가슴이 터져버릴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 기억이 좀처럼 달콤하지만은 않으나 찾아가 다시 인사를 해도 될만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20년 만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그 때 외가의 녹색 대문 앞에서 작별하는 엄마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다. 나에게 헤어짐이란 것은 그 때에 그랬다. 외할머니와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나오는 눈물일까,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의 눈물일까. 순수하지 않은 눈물이라 흘리지 않았다. 되려 엄마가 우는 모습이 너무 싫어서 나는 울지 않았다. 그것이 슬픔인 줄 알았다. 그 슬픔은 노란색이었고 이사집을 실은 용달 안에서 그 슬픔은 차차 녹색의 기다림으로 바뀌어갔다. 그럼에도 나는 그 때의 흐느낌과 애틋함을 물처럼 마시고 살겠노라 다집했다. 시골집 찬장에서 몰래 훔쳐 시작한 유쾌한 라면 끓이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즈음 여수에 도착했다.  열 평 남짓한 집에 방 두칸, 화장실과 부엌은 붙어 있었고 빛이 들어오지 않아 유난히 회색이 어둡게 보였다. 파란색 천으로 된 옷장만 덩그러니 방 한칸을 메우고 있었다. 내 오랜 책상은 버려졌고 밥상이 제 몫을 할 때를 제외하고 그 빈자리를 채워 주었다. 큰 방에는 친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건너방에는 우리 가족 네명이 말 그대로 살을 부대끼고 잤다. 큰아들이라는 이유로 동생에게 엄마의 옆자리를 내어주고 네명이 누울 자리가 없어 나는 그들의 발쪽에 몸을 누이고 잤다. 돌아누워벽을 바라보고 늘 한시간 가량을 긴긴 눈물로 보냈다. 우는 소리를 들킬까봐 모두가 잠에 들 때까지 기다려 이불을 둘러쓰고 생각했다. 독립이었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제시한 독립이었고 사실은 독립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그 때까지 나는 '가난'을 몰랐으며 내 나이 또래의 모두가 이런 상황을 겪으며 사는 것이라고 여겼었다. 때때로 나는 대낮에도 이불을 둘러쓰곤 했다. 여수수산전문대학교(현재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 학생들의 최루탄 시위로 인해 그 주변 동네의 모든 아이들은 매일 울고 살았다. 외할머니와 헤어질 때에도 울지 않았던 나는 처음으로 경험한 최루탄에게 눈물의 순결을 빼았겼다.      
 



돈이 많다던 그 동네. 
내가 살았던 동네와는 너무 다른. 
자가용이라는 것이 있고
모든 것에 소유가 있었던 곳.
  
다리가 없는 사람을

다리가 없는 사람으로만 보고. 

가난한 복장의 사람을

가난한 사람으로 보았다네. 
해가 서쪽으로 진다는 것을 알고
매일 저녁이면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두고 온 벗들을.

그리워했지. 

                                                           


                                       
 이웃이 없었다. 커져버린 공간은 집합체의 느낌을 지우기에 충분했고(전에 내가 사는 동네의 그 누구라도 나는 알았고 누구도 나를 알고 있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나의 관심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일도 점점 두려워져갔다. 내가 사는 집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 길 건너편에서 빨간 양푼을 머리에 인 아줌마들 틈에 끼어 갯벌냄새 가득한 버스를 타고 여수시내쪽으로 간다. 오른쪽으로 돌산대교가 보일 때 즈음에서 세 정거장만 더 가면 학교다. 안내방송이 없던 시절에 나는 그렇게 계산을 하고 키 작은 나를 하루에 두번 바닷물로 질척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동갑내기 고종사촌과 함께 다닌 여수서국민학교는 산 중턱에 있었다. 2학년 4반으로 전학을 갔고, 젊다고 하는 여선생님이 나의 담임선생님으로 왔다. 나는 처음으로 새로운 얼굴들에 노출이 되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그렇게 나를 알렸다. 까만 얼굴 덕에 달구어진 낯빛을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 내 작은 가슴을 얼마나 쓸어내렸던가. 다시한번 나는 키가 작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선생님은 나를 교실의 맨 뒷자리에 앉게 했다. 처음으로 얼굴이 하얀 아이들을 보고 신기했다. 반면에 나는 누가 보아도 시골스럽다는 얼굴빛을 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나를 원숭이 보듯 한 것도 당연한 처사였다. 허름한 옷차림의 나는 허름한 책상의 주인이 되었고 짝궁도 없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내 옆의 자리는 어느순간부터 비어있었다. 그렇게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고 학교를 다녔다. 얼마 후 아버지가 학교를 방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때 아버지는 나의 모습과 주어진 환경을 보고 붙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으니까 이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친구의 생일에 초대를 받았다. 침대라는 것이 있었고, 커다란 티브이가 있었고, 깜빡이는 흰색 형광등 대신 스위치를 누르면 순간 거실의 모든 곳들이 주홍빛으로 물드는 샹들리에가 있었다. 사용법을 알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만지지 못하는 그것들에게 예의 인사를 했다. 가족들 수저 외의 손님용으로 추정되는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들로 나는 진귀한 음식들을 탐냈다. 마을잔치나 명절이 아니면 먹을 수 없었던 고기라던지, 고기를 응용한 -탕수육, 통닭 등- 음식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내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얼마 후 나는 엄마를 졸라 우리집에도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게 되었다. 구수한 남쪽 사투리를 쓰는 우리엄마의 호탕한 웃음에 겁을 먹었는지 친구들은 문 앞에서 내내 망설였다. 사실은 거실이라고는 없는 우리집에 그들은 들어오기를 꺼렸다. 사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담배연기 자욱한 우리집에 들어오기를 꺼렸다. 사실은 앉을자리도 없는 우리집에 그들은 들어오기를 꺼렸다. 멀어져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그랬다. 나는 가난하지 않아, 나는 가난하지 않아. 그 후로 어느 누구도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나 또한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엄마한테 미안했다. 

 여수의 시내에 엄마가 일하는 통닭집이 있었다. '림스치킨'이라고 하는 상호의 고모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최근에 대학로 근처에서 이 상호의 치킨집을 본 적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닭을 즐긴 적 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충무동 대한생명 빌딩 앞 고모가게로 달려가 엄마랑 동생이랑 오후시간을 보냈다. 바쁜 가게안을 휘젓고 다닐만한 성격이 못되고, 오락실을 좋아하는 사촌과 내 동생과도 즐겁게 지낼 수가 없어 나는 늘 그 동네 골목길을 서성거렸다. 이른 바 '구경'하는 것이 내 일상의 전부였는데, 누구네 혹은 낯선 이의 행동들을 관찰하고 뒤따라가 보기도 한 그 시절의 습관 덕에 지금 내가 이 곳을 찾아도 헤매지 않고 구석구석을 기억해낼 수 있게 되었다.   

 다리가 없는 사람, 고무재질로 된 바지를 입고 바퀴가 달린 수레를 통해 몸뚱이를 이동하는 사람. 뱀 처럼 땅을 기어다니는 사람을 나는 처음 봤다. 차가 다니고 길 양옆으로 인파가 가득한 그 길을 다리가 없는 사람이 기어다녔다. 다리가 없는 사람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스팔트 도로위를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있는 그런 사람을 처음 본 것이었다. 나는 그 광경에 넋을 잃고 울어버렸다. 저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고 엄마는 나를 달랬지만 나는 슬퍼서 운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그 사람을 보는 게 불편해서 울었다. 내 마음과 다른 풍경들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 사람만 가위로 오려내서 가급적이면 하늘에 붙여주고 싶었다. 매번 사람들을 올려다 보는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하늘에서 누구나 내려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된다고 말했다. 엄마는 돈있는 사람들만이 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거리를 지나는 이 많은 사람들 중 돈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 걸까, 나는 힘이 없지만 저 사람은 힘이 좀 있지 않을까, 왜 눈이 있으면서 보지 않지?, 저 사람은 나처럼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몇날 며칠을 했다. 적응은 무서워서 나도 쉽게 마음을 져버렸지만 지금도 다리가 없는 사람들을 보면 그 때의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물론 지금은 너무 커버린 나의 신체 덕분에 그 때보다는 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머리는 굵고 가슴은 순전하지 못해 앞만 보고 갈 길을 갈 뿐이다. 

 나는 차라리 이 모든 새로운 것들을 보지 않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보는 내내 나는 성장통을 앓았고, 그것은 아팠으니까.  엄마의 수술과 아버지의 술병. 그리고 나에게 닥친 새로운 가치들에 대해. 나는 그 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이 나를 더 성장하게 했다고 말할 뿐,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말을 어른이 되서야 들었을 뿐. 뭐든 원래부터 그래야 하고 그래왔다고 하는 당위성을 그 때도 지금도 반기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 밝히 안다고 하는 것이.  나 스스로를 보다 잘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일까.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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