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칼을 빼 들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노래는 어떨까, 조심스럽다. 


혼인을 하고 난 후부터는, 정확히는 그것과 겹친 세월호 사건으로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웃어도 쉬이 웃지 못하고 늘 그래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좋아하던 야구도, 깨볶아야 하는 신혼도, 일상인 노래도. 

그렇게 마냥 나날들을 흩어지게 내버려 둔 채로 버거운 삶을 지탱하기 위해 수업만, 해야할 최소한의 일만 하고 살았다.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는 날 선 언론의 혀가 유가족 뿐 아니라 나와 주변인들을 많이도 힘들게 했다. 

힘이 들 지언정 힘이 되주지 못해 마음만 이리 저리 굴려보았던 터 서울의 하늘은 맑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제 곧 가을이다. 벌써 가을이 왔다고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는 아내와, 

털이 송송 빠지는 두 마리의 고양이들과 가을을 맞는다. 

해마다 가을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는 늘 불가항력적이다. 아내는 그걸 두고 '지랄'이라고 하지만, 

여튼 그런 '지랄'도 못해먹겠다. 뭐라도 해야지 혼자의 기분에 취해 이 계절을 두고볼 수는 없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마음에 두고 뭐라도 써야지 뭐라도 말을 해야지, 하지만 

예전처럼 즐거울 따름으로 흘러가는 일은 없었다. 


오늘 민방위 훈련을 간 자리에서 우연히 종석형을 만났다. 

시간이 참 빨리도 가지요? 우리가 엊그제 만난 것 같더니 벌써 6년이요, 라고 했더니

그래, 내가 아이였을 땐 하루가 참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안갔는데, 라고 한다. 

그냥 저냥 속으로 내 얘기와 그 얘기를 번갈아 생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문득, 

노래를 써야 겠다, <가을엔> 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이래 저래 써나가다 보니 <오, 가을> 이 낫겠다 싶어

두 줄로 박박 그었다. 소박한 가을정경을 노래하고픈 생각이었으나 점점 일이 커진다. 

속내를 좀 들키면 어때, 내 마음대로 하면 좀 어때, 그렇게 써지는 것을. 


아내가 추천해 준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이라는 책과,

오늘 만난 종석형과의 대화와 얼마 전 안타깝게 사라진 우리 아이와 그 때의 내 마음과,

여태 나를 짓누르던 4월부터의 일들이 한꺼번에 오늘 모였다, 모았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것은 늘 노력의 열매가 되는 것임을 오늘도 깨닫는다. 


그렇게 일곱개의 방 중, 다섯번째 방이 만들어졌다. 



<언젠가 후암 약수터 앞>


오, 가을 (140930) 



왜 이 계절은 이토록 바삐 가는가

연잎에 앉은 잠자리처럼

왜 뜻밖의 추억들이 되살아나는가

구름 사이로 난 해처럼

왜 사랑한 순간들은 잊혀만 가는가

그때 한 약속은 연기처럼 흩어져만 가는 것인가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흘러갈 줄 알았다면

내가 아이였을 때 조금 더 천천히 달려갈 것을, 걸어갈 것을


이제 짧아진 계절이라 해도 서두를 필요는 없네 

신이 빚은 완벽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모든 순간을 다 감사하겠네


올 봄에 우리에겐 슬픔이 있었네

시들더라도 꺾(이)지 않기를 바랬지

그 누가 인생을 완성하고 떠났을까


이제 짧아진 계절이라 해도 서두를 필요는 없네

신이 빚은 완벽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데로 가 깊은 데로 가면

내가 사랑한 사람들

깊은 데로 가 깊은 데로 가면

내가 미워한 사람들까지


모두, 모두 다 만나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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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아내가 말했다. 

"이제 곧 지랄할 때가 왔는데, 말야"

해마다 가을이 되면 아내의 말 대로 '지랄'을 떤다. 

어떤 일에 유난스럽다던지, 시무룩한 것이 하루종일 간다던지,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다던지.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연 그랬던 것 같다. 


그녀의 말을 빌려 '지랄'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내 주제엔 '지랄'이 맞다. 

지랄은 어찌보면 미친 것이고 미치지 않고서야 매번 노래를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녀의 말을 아주 '잘' 받아들였고 그제서야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요즘 미쳐있지 않구나, 나는 지랄을 하고 있지 않고 있어, 라고.


책을 읽고 있는 요즘엔 _ 그 이전엔 이처럼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자의 생각에 내 마음을 보태 이런 저런 글귀를 써나가본다.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이 아내의 말처럼 가을에 관한 것이어서 몇 자 끄적여본다. 



가을엔. 


하늘 아래 고요한 평온 속에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물 한잔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침묵에


나는 왜 슬픈지 알고 있지만

왜 우울한지는 말할 수 없어


이제 짧아진 계절에 즉흥적일 필요는 없네

신이 만든 완벽한 세상을 구경하는 것에 

나는 찰나의 의미를 다 쏟아부었네


욕심없는 나무 아래 있을 때 비로소

하늘에 빠진 무언가 바라볼 때 비로소

잎새에 부는 바람을 느낄 때에 비로소


내는 왜 슬픈지 알고는 있지만 

왜 우울한지는 말할 수 없어, 라고



내가 가 닿아야 할 침묵과 고요와 

잃지 않아야 할 미소와 포옹


올 가을엔 깊은 데로 가자  깊은 데로 가면

내가 사랑하는 이 미워하는 이 다 만나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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